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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외할머니댁에 갔었다. 하룻밤을 자고, 잠에서 덜 깬 상태였지만, 여느 시골이 마찬가지듯 이른 새벽부터 외할머니께서는 아침준비에 여념이 없다. 외손자가 깰까 조용한 움직임으로 아침밥상을 차리시는 외할머니의 배려심은 언제나 한결같다. 시골밥상이라는 게 간소하며 투박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방학마다 놀러온 시골밥상에 익숙해져 있고, 구수한 시골밥상이 언제나 향수를 자극한다.
된장찌게와 함께 오른 반찬은 계란찜! 노란 색깔이 매우 진했다. 숟가락으로 계란찜을 큼지막히 구멍을 내어 퍼 입속에 넣는다. 깜짝 놀랐다. 이전에 먹어보지 못한 계란찜맛이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만큼 계란찜은 입에서 살살 녹았고, 단백한 계란맛이 뇌를 진동시킨다. 이제까지 먹어오던 계란찜은 도대체 무언인가하는 생각마저 드는 감동적인 맛이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바로 실행에 옮겼다. 외할머니st. 계란찜 만들기법의 핵심을 정리하면,
1. 계란을 겁나게 휘젖는다. 물처럼 흐를 정도로 섞어야 한다. 이 물로 만들기가 외할머니st. 계란찜만드는법의 2가지 핵심 중 하나다!
2. 물을 계란의 2배에서 3배로 부어 소금과 조미료로 밑간을 한 후, 다시 휘젖는다. 물과 계란이 혼연일체가 되도록!
3. 그리고 냄비에 부어 최대한 약불로 오랫동안 찐다. 서서히 계란찜이 부풀어 오를 때 불을 끄는 것이 외할머니st. 계란찜만드는법의 라스트액션이다.
위와 같은 공개된 비법이지만, 실제로 외할머니st. 계란찜만드는법의 결과물은 언제나 다르다. 더구나 단 한번도 그때 먹었던 맛을 내지 못했다. 외할머니의 계란찜은 역대 먹은 계란찜의 역대급에 속하는 것이다. 재생을 할 수 없다는 것에 실망감이 컸다.
그래도 여러번 거듭한 결과 근사치에 가까운 계란찜을 만들기는 했다. 부드러운 계란찜 속살의 표면도 기포없이 매끈하게 요거트처럼 결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매번 이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엄마가 도시락으로 사간 계란찜을 동네 할머니께서 잡수어 보더니 어떻게 계란찜을 이렇게 만들 수 있냐며 특급칭찬을 하셨단다.
그러나 여전히 외할머니st. 계란찜만드는법을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는 장인정신을 가지고 도자기를 빚던 도공들의 마음이 아닐까? 언젠가 드라마에서 한 도공이 하염없이 도자기를 굽고 나서 깨는 게 일이었다. 도공일을 배우던 성격급한 머슴이자 제자는 그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가 보기엔 훌륭한 도자기인데, 내다 팔면 필시 돈이 될텐데 왜 계속해서 망치로 도자기를 파괴하는지 스승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 후 스승이 죽기전 끌어앉은 채 쓰러져 죽었는데 그 품 안에 있던 것은 도자기였다. 그 중간 스토리는 어렸을 적에 본 것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라스트씬은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 어리석은 제자는 노인이 다 되었다. 그리고 스승의 도자기는 높은 가치가 매겨진 상품이 되었다. 기어코 그 제자노인은 그 도자기를 얻고자 한다. 근데 흥미롭게도 소유하기 위해서 얻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스승에게 배운대로 일정한 기준에 못미치는 도자기를 부수기 위해서 였다. 소유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의 집념은 강했다. 어떠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스승의 파괴행위, 엄격한 자기기준에서 자신이 생산한 작품을 구별하고, 마음에 충족된 것만 인정하는 고집스럽지만 멋스런 장인정신! 대략적으로 그렇게 기억을 한다. 근데 결과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노인이 그 도자기를 파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정한 장인정신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자있는 생산물을 파괴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채찍질을 하는 자아성찰의 과정이 아닐까? 그러한 고뇌와 자기부정, 날마다 새롭게 자신을 거듭나게 하려는 '일일신, 우일신', 장인의 모습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부분이 아니고, 뒤에서 고뇌하는 그림자부분이 아닐까 하는 어두운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러한 장인정신과 외할머니st. 계란찜만드는법을 거듭하며 불만스러움에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비교하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한 기준, 궁극의 맛을 보았던 그 짜릿함과 놀람! 그것을 맛 본 이들에게 자신이 만들어 낸 하류작들에 만족해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찌보면 그때 맛본 외할머니표 계란찜은 객관적이며 고정된 상품으로서의 맛이 아닐 수도 있다. 외손자가 잠에서 깰까 조심하며 만든 아침밥상의 정성에 대한 고마움과 처음 맛본 그 짜릿함이라는 나의 주관적 감정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
어제도 그 맛을 새기며 외할머니st. 계란찜만드는법을 재현해본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다. 그리고 다짐한다. 언젠간 꼭 맛보리라고! 그때까지 부단히 시도해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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