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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새해 첫 글은 어떻게 시작할까? 

벌써 쓰고자 하는 글들이 꽤 밀린 상태다. 바도가 밀려오듯 강렬한 체험과 각성이 쉬없이 때린다. 그 체험과 각성에 정신을 집중하여 관찰하고, 키워드를 뽑으며, 머리에 차곡차곡 정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동안 어떻게 정적인 삶을 버텨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봉인이 풀리는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축적된 기억과 반면교사된 깨달음이 정신없이 뒤섞여 아드레날린이 분출한다. 이 흥분된 에너지가 현재 일정한 방향없이 여기저기로 튀고 흘러넘치는 활화산의 마그마같다. 이제부터 고삐를 천천히 쥐어야 할 때이다!


이제야 온라인 상에 내 개인적 체험과 각성을 표출하는 이유와 각오를 밝힐 때가 된 듯하다. 난 왜 굳이 지극히 나에 국한된 필터내에서의 관찰 결과를 무작위로 온라인 상에 분출하고자 하는가? 이유는 어찌보면 간단하다. 인간의 표현행위는 본능과 같다. 그 본능과 같은 인간의 표현행위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 즈음하여, 인류 진보 역사도 태동했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니 혹여나 딴지걸고 싶은 이들은 자제를 권한다!




인간이 지능이 생기고,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하여 그 이미지가 쌓이고 쌓여, 일정한 기호로 발전하게 된 진화의 역사! 놀이를 위한 작업일 수도 있고, 어떠한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종교적 열망의 표현일 수도 있고, 공동체적 삶에서 중요한 의식적 행사나 생존을 위해 사냥을 연습하는 훈련 장소일 수도 있는 그러한 표현의 시작은 라스코동굴이나 알타미라 동굴의 동물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의 첫 태동을 300만년으로 추정하고 가정한다면, 이 표현의 역사는 5만년을 넘지 않는다고 어림 계산해도 원숭이조상에서 돌조각이나 석탄을 들고, 동굴에 표현하기 시작한 역사는 기껏해야 기원전 15,000년으로 가장 길게 잡아봐야 290만년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인류 진화 역사의 가장 중요한 꼭지 중 하나는 이 이미지로 생각을 투영하기 시작한 동물벽화 사건이었다. 인류의 원형인 '루시'에서 표현하는 인간으로 탈바꿈하는데 이리도 장구한 시간이 흘렀다는 건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펜으로 종이에 쓰던 삶이 수천년을 이어나가다 이렇게 온라인 이라는 가상의 세상에 필기구 대신 키보드로 새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역사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혀를 내두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별 생각없이 이를 활용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내 온라인 상 글쓰는 행위를 거창하게 미술의 태동과 엮을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이 글쓰는 행위를 좀 예민하게 생각하고, 인류적 시각으로 본다면, 얼마나 멋지고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자 '이미지'를 이야기했다면, 다음으로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글은 엄밀하게 생각하면 이미지다. 단지 이미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근원적이며, 확장성이 강한 매개체라면, 글은 좀 더 실용적이고, 의미가 좁혀지는 기호체계이다. 이 이미지에서 글자로 변환되는 과도기에 이미지의 힘을 빌리고 있는 '상형문자'를 보면 짐작이 쉬울 것이다. 



새와 알, 인간들의 모습이 일정한 패턴으로 줄지어 서 있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신비하면서도 멋스럽다. 뭐랄까, 대단한 힘과 의미가 새겨져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한다. 영화 '미이라'를 보면, 내 말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자의 시작이 이미지였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어쩌면 지금 글자를 쓰는 행위가 매우 실용화 된 미술행위일 수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 본다. 무슨 말이냐구? 예술의  카테고리는 다음과 같다. 미술, 음악, 무용, 건축, 그리고 문학! 문학은 글로써 하는 예술행위이다. 일정한 형식에 의해 창작되는 시, 소설, 극, 수필 등이 문학범주의 구체적 형태들이다. 작가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원하는 모양새를 갖춰 운율을 부여한 '시', 허구적 사건과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하는 '소설', 무대에 상영되게 할 목적으로 대사와 무대장치를 서술한 '극'! 이 모든 것이 글로써 이루어 지는 예술, 즉 문학이다!




다시 '기록'이라는 테마로 돌아가자. 기원전 1760년경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 이는 바빌로니아 창건자 함무라비 시대의 법률을 돌에다 깍아 기록한 것이다. 별 감흥이 없는가? 이 시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곰에서 인간으로 변하여 단군을 낳고, 그 단군왕검이 우리 한반도 지역을 통치하던 고조선 시대이다. 우리의 단군할아버지 시대의 법전은 어디에 있는가? 단군왕검이 신화로 남아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우리에게 신화의 시대가 바빌로니아에서는 기록과 법률에 위한 통치의 시대였음을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는 미국과 같은 신생국가에 비하면 전통이 있는 나라지만, 인류보편사적 시각에선 별 볼일 없다는 점은 '자학'이 아니라 냉철한 지성에 의한 '자각'임을 강조하고 싶다.



단군신화가 글로써 우리의 기록에 남겨진 것도 함부라비 시대가 아닌 기원후 천년이 넘은 고려시대에서 한문으로 기록된 '삼국유사'에 의한 것이다. 기록의 역사에서 우리는 한참 뒤떨어져 있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다. 이를 고려할 때 이 '함무라비 법전'의 위대함은 섣불리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좀 더 화제를 좁혀 보겠다! 함무라비 법전을 자세히 보자! 돌이다. 돌에다 한 자 한 자 파서 만든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얼마나 힘들게 팠을까? 그러나 그 돌에 새긴 작업의 영속성은 가공하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우스갯소리 하나가 기억난다. 보통 공부 못하는 이들을 이르러 돌머리라고 했다. 아무리 가르치고 배우려 해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는 이들을 빗대어 만한다. 그러나 돌에다 쓰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쓰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돌머리의 장점을 이르길, '돌머리에 한 번 기억하면 평생간다!' 얼마나 간단명료한 정리란 말인가! 미술적 메타포도 있으니 이 정도 은유적 표현은 문학적으로까지 들린다!



동물벽화의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문자의 탄생, 함무라비법전, 단군신화까지! 이 모든 주제어들은 모두 내 관심분야의 키워드들이다. 남들은 주식과 부동산, 복리, 비과세와 같은 실제적이며 실용적이고, 경제적 부를 창출하기 위한 키워드에 집중하고 있는데 난 이렇게 돈도 안되는 주제들에 지적 흥미를 느꼈고, 남들의 현실적 모습을 천박하다고까지 생각했으니 참 내가 미친놈아니겠는가! 고상함은 있는 자들의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흥미에서 시작하는 게 어떤 면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거늘, 없는 자가 이런 주제에 관심을 두고, 즐거워 했으니 이 얼마나 단계를 무시한 일이란 말인가!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고상함과  인문적 지식에 대한 지적 흥미가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매우 중요하고, 또 재미난 분야이다. 한 번 빠져들면 평생 빠져서 살고 싶은 요지경의 세계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사회적 존재! 고상함이 밥을 먹여주지 않음을 자각하는 건 어쩌면 어른으로 향하는 발달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무시하고, 망각하고, 회피한다. 이 또한 나의 무지와 게으름과 함께 현재의 나를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고상한 거렁뱅이!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자! 이제 정리를 해보아야 겠다. 좀 더 장황하고, 길게 쓰고 싶지만, 오늘 산에 가족들이 인왕산을 간다고 한다. 한 번도 가지 못한 곳이라 함께 묻어서 갈까하는 마음에 이 글을 간단히 끝내려 한다.


글쓰는 행위는 인류의 지적행위이며, 나름 고상한 행위이다. 물론 글의 내용이 좋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쓰레기 글마저 이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모독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구성원이면, 자신이 생각한대로, 자신이 하고픈 것만 하고는 살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인정하고 가야만 우리는 현실세계를 직시할 수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움으로 가득하여 자신의 눈 안에서 흠없이 완벽한 삶을 그리려 하겠지만, 그건 몇몇 프로페셔널에게만 인정됨을 또한 알아야 한다. 


사람의 삶 구석구석, 지저분하고, 더럽고, 참혹하기까지 한 추잡스러운 곳도 알아야 한다.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군상들과 감정, 악취마저도 오감을 통해 체험해야 한다. 그런 이후 정말 자신의 의지와 고고함을 지켜내는 것이 군자의 모습이다. 공자가 말했다.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가 아닌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결코 현실적인 해결책을 파악할 수 없다. 사람들이 왜 예가 아닌 행동을 하는지, 그 안에서 어떤 심리와 이익관계가 얽혀있는지 그것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진정한 문제와 열렬히 부딪칠 수 있다. 고상하게 부채를 흔들며, 사서삼경을 암송하며, 점잖게만 행동하고, '허허~'하며 근엄하게 문자를 쓰는 이들이 과연 진정으로 군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전의 나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판타지다. 아마도 자기 삶의 내부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사람들과 벽을 쌓고, '나는 님들과 다르다'라고 자신만의 성 안에서 고고함을 지키는 행위! 그것도 나름 멋지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보편성, 사회적 존재성을 말살하고, 희생시키며 사는 불완전 삶이다! 그렇게 산으로 들어가 입산수도를 하는 이들을 요즘은 '자연인'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세상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한데 그 단면에 상처입고, 아프다며 숨는 것은 또 얼마나 가련한 영혼의 모습인가! 이제 다시 원초적 질문들로 돌아서려 한다. '생존!' 살아나는 것! 현실 세계에서 최고의 가치! '최후의 생존자'가 되는 것! 사실 이 경쟁 구도에서 자유로운 이들은 별로 없다. 모두가 이 생존이라는 가치를 목표로 자신을 연마한다. 당연히 낙오자도 발생한다. 이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생겨나는 승리자와 낙오자! 이 모든 것도 현실세계의 모습이다. 이를 직시하느냐, 외면하느냐에 대한 판단이 지금 이 글쓰기의 가장 큰 갈림길과 같다.


나의 온라인 글쓰기는 좋게 말해 인류의 보편적 표현행위의 현재까지의 최종적 발전형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이자 실험이다. 동굴벽, 파피루스, 한지, 노트 등에 쓰던 글을 이제는 가상의 공간에 기록하고 있는 인류 진화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표현코자 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핵전쟁이 일어나 이 세상의 온라인이 마감하는 그 날까지 존속하게 될 것이다. 온라인 글쓰기를 해서 나의 생각과 감정의 기록이 내 개인적 노트나 메모장에 기록되는 수준을 벗어나 전 세계 어디든 컴퓨터와 인터넷이 있는 곳 어디에서도 접속하여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다.


글쓰기는 적극적으로 남기는 행위이다. 그것은 과거의 나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선택하고 판단했는지 이 온라인 글쓰기를 통해서 나를 확인하고, 지금의 변화된 나를 인식한다. 이미 이러한 경험은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 온라인 글쓰기를 통해 생산된 글을 통해서 재확인한다. 이미 나는 내 가설의 실험을 마친 상태다. 


글쓰기는 생산이다.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프로듀서! 즉, 생산자이다. 비단 음악을 만드는 박진영이나 TV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을 프로듀서에 제한할 필요는 없다. 생산하는 자는 모두 프로듀서다. 나는 내 삶의 성과와 기억, 체험들을 온라인에 글을 쓰는 생산행위를 하는 프로듀서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울리고 있는 중이다.


온라인 상에 생산된 글은 언제나 다른 이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다. 어떤 이들이 내 글을 읽고 반응한다. 이 때부터 매우 적극적으로 소통은 이루어진다. 몇 일전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주머니 한 분과 마주친다. 이전 아파튼 리모델링 추진위 활동을 하던 시기에 만난 분인데 그 때 만났던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이 다가와 하시는 말씀이, '온라인에 올린 글 봤어요! 너무 감동적이던데요! 엄마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어요!'


이를 통해 그간 막연하게 나마 이 글쓰기가 나중에 나의 삶의 방향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생각이 증명되는 첫 케이스가 되었다! 소통이 시작될 신호탄이 터진 것이다! 향후 내가 만나는 많은 이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내 글을 읽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반응하게 될 것이다. 아예 티를 내지 않은 이들도 있겠다. 내가 주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이점이다. 내 글에 반응하며, 소통이 시작되는 이 지점!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 반영된 글을 근거로 매우 구체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역동적 관계형성이 이루어지는 이 시작점이 결국 이 생산적 온라인 글쓰기의 매우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소통의 단위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온라인 글쓰기는 테마와 키워드가 축출된다. 대중들은 내 글을 온라인을 통해 만나게 된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반응과 관심사들을 파악하게 된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전의 나는 남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제일 중요했고, 나를 많이 사랑했다. 어느 누구도 나 이상으로 배려하거나 좋아해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이제 사람들의 반응과 그들의 원하는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관심사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장치가 이 온라인의 장점이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재미나다. 이 점이 온라인 글쓰기의 흥미요소다.


온라인 글쓰기의 채널은 나의 광고판이기도 하다. 나를 홍보하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직 구체적 체험이 없기 때문에 상상으로만 하고 있지만 분명 생산물이 쌓이고,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온라인 글쓰기의 실제적 결과물이다. 이 글쓰기는 오프라인 글쓰기가 서점에서 유통되어 판매되듯이 역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 사실 이 부분이 온라인 글쓰기를 막연하게 시작하여 유지하다 강하게 끌어들인 기폭제이기도 했으나 여전히 지금도 이 가능성에 대하여는 의구심이 강하다. 아직 땡전 한 푼 이 온라인 글쓰기를 통해 받아본 적이 없다. 역시 이 점도 실험의 한 분야이다. 돈이 들어오는 순간 온라인 글쓰기는 또다른 양상으로 진화할 수도 있게 때문이다!


마무리하자! 온라인 글쓰기는 생산행위요, 기록하는 행위요, 자신을 들여다 보는 거울이요,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베팅이요, 사회를 알기 위한 반응살핌이요,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수단이다. 하나의 행위가 여러 개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온라인 글쓰기의 훌륭한 장점들이다. 그래서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온라인 글쓰기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지 여전히 반응이 미비하다. 조급증이 있는 내가 참아 낼 수 있을까도 중요한 변수이다. 갑작스럽게 중단할 수도 있다. 인생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이 실험이 어디까지 내 생각대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다. 일단 재미나니 계속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변화에 집중할 것이다. 


이 쓰는 목적을 밝힌 인트로를 다시 작성하게 될 그날까지 실험을 계속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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