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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의 작품 '크리스마스 캐롤'은 우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알려져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작품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크리스마스 전날밤 꿈에서 세 유령들이 순차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유령들이 과거, 현재, 미래로 스크루지 영감에 교훈을 얻도록 인도한다. 과거에서는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을, 현재에서는 조카와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이의 집을 방문하여 여러운 현실에서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따뜻한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미래에서는 자신의 조카 이외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한 죽음의 모습을 보며, 순식간에 인생이 탈바꿈된다. 그 변화의 모습은 실제 삶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법한 만화같고, 드라마같은 대오각성한 현자의 모습이었다.
어떤 이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선물의 인물과 사건이 지나치게 작가의 통제아래에서 진행되어 답답하거나 몰입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또, 너무 갑작스럽게 변한 스크루지 영감의 행동이 오버액션같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이솝우화나 그림형제의 동화집에서 나오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보며, 나름의 재미와 지혜를 얻는다. 매우 짦은 스토리와 사건 전개는 완전히 작가에 의해 닫혀 있고, 면면히 글은 이어나간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솝과 그림형제에게 글의 진행이 답답하거나 몰입도가 떨어진다고 말하지 않고, 신데렐라의 화려한 변신이 비현실적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주는 메세지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작가에 의해 주어주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기준으로, 그리고 자기의 관점만으로 작품을 평가하기엔 찰스 디킨스의 명성은 크고,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 또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만화영화로도 제작되었으니 그 파급효과는 크다. 뿐 만 아니라 많은 극작품에서 이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선물 플롯과 스토리는 많은 영감과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는 명작 반열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선물의 결말 부분에서 스크루지 영감의 개과천선을 오버액션으로 치부하기는 것은 과격하다. 물론 그렇게 크게 변하는 사태를 우리는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히 Before와 after를 대비 시키려는 문학적 장치라고 말하기에도 무언가 아쉽다. 인생에서 삶의 큰 변화를 느끼고, '어제와 완전히 다른 오늘의 나'를 만나는 건 사실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 면을 부각시킨다면 스크루지 영감의 급변은 오버액션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급변할 수 있기 바라는 것이 또 우리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람은 이전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꽤 힘들다. 그 관성의 지배는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통제한다. 더욱이 그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고통과 자기부정, 의식적으로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단초가 되는 각성원인이 있어야 한다. 찰스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비유하자면 세 유령과 만나는 악몽일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스크루지 영감의 내면이다. 우리가 꿈을 통해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깨달았다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실제로 몇이나 되겠는가! 찰스 디킨스가 의도를 했던 하지 않았던, 스크루지 영감은 악몽을 꾸기 전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족과 불행감, 이러한 삶에서의 변화와 탈출을 꿈꾸었을 것이라 나는 기본적으로 전제한다. 그러한 현재의 문제의식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 유령의 악몽은 실제로 단순한 악몽으로 끝났을 것이다. 변화의 갈망없이, 정말이지 구두쇠의 모습으로 어떠한 의문도 없었다면 스크루지 영감은 그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눈물이 그의 얼굴에 뒤범벅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일어났을 때,
"뭔 이런 재수없는 꿈을 꿨대! 퉷!"
이렇게 말하고 당연히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하여 그렇게 살다 죽었을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점을 내 나름으로 생각해보면, 만족스럽지 않고 불행한 감정을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노년의 스크루지 영감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미 늙어 이전까지 삶을 굳이 복기하고, 반성하기 보다는 그대로 살아도 이상할 리 없는 노년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음은 어쩌면 가장 변화가 어려운 인생의 시기를 찰스 디킨스는 노리지 않았을까? 의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믿고 스크루지 영감을 주인공으로 만든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옹고집에 변화를 전혀 할 것같지 않은 고약한 노인네 스크루지 영감도 변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도 가능하다고 설파할 생각으로 작품을 써나간 건 아닐까? 이러한 나의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작품해석은 영문학을 전문분야로 작품을 분석하는 전문가들과 관련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이고, 나의 현재 이러한 시도는 작품과 작가와 나의 독대이다. 사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정신적 산물은 이러한 독대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그 이외의 작업과 연구들은 서브로 참고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야 온전히 내식대로 작품을 감상하고, 그를 통해 얻은 의미를 역시 내 방식대로 내 개인적 삶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문가들의 권위와 성과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내 생각의 참조사항이나 Footnote에 들어갈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해석과 판단, 그리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의 주체는 오로지 나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마감 시기의 스크루지 영감도 이러한 변화와 탈출을 갈망하고, 우연히 꿈 속에서 찾아온 세 유령들이 자신에게 준 교훈이 어쩌면 그 인생에서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오버액션으로 보일 스크루지 영감의 변화는 내게 있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희망의 상징적 표현이며, 변화는 언제나 극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변곡점을 사람들은 갈망한다. 차이라면 그 변곡점 또는 기폭제로 작용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악몽이 스크루지 영감에게 강한 원동력이 되고, 그 원동력을 용감하고, 자신감 넘치게 일상에서 바로 실천한 매우 급격한 행동주의를 보인 부분이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오버액션보다는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강렬한 의지와 실천을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사실 그렇게 강하게 바로 현실에서 변화를 감행하는 용감한 스크루지 영감보다 못하는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스크루지 영감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러한 노년의 존재도 변할 수 있으니 너도 현재의 삶에 행복하지 않다면, 변화를 감행하라는 메세지를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찰스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선물! 그것은 인간성에 내포된 변화에 대한 갈망이고, 그러한 변화에 대한 희망은 용기있는 결단과 실제적 삶에서의 구체적 행동실천이라는 메세지이다. 자! 이제 남은 것은 '변화를 삶에서 실천'하느냐 아니면 흐지부지 인생이 뭐 다 그렇지 하고 체념하며 '일상으로 복귀'하느냐의 문제만이 내게 남는다.
자각과 반성, 변화모색과 삶의 실천, 일상으로의 복귀!
모두 인간성이라는 테마의 핵심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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