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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엄마는 김장을 하러 외가댁에 갔다. 지난 몇년간 나도 함께 동참한 김장행사에 이번에는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아 불참을 선언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춥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번 김장철 김장김치를 담았던 경험이 있어 김장배추를 소금물에 저리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큰 고무다라에 배추를 잘라 소금을 뿌려 재우고, 한참 있다 이를 몇 단계에 걸쳐 소금에 절여진 김장배추를 씻어내는데 이게 보통 밤늦게나 새벽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거 할 때 기온이 떨어져 춥기라도 하면 노동의 강도는 2배에서 3배로 훌쩍 뛰어 넘는다. 얼마나 힘든지 사실 이 소금에 절인 김장배추를 물에 몽땅 씻고 나면 김장절차의 3분의 2는 끝난 기분이었다. 근데 이번에는 아주 딱 이 단계를 수행할 때 날씨가 포근했다고 한다.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우리 엄마가 그런 힘든 경험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참 기분이 좋았다. 가족은 그런 것이니까! 가족이 아프면 내가 아프듯 언제나 마음이 무거운 것. 남들이 아플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 아닌 내몸같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가족의 정이다!
김장김치를 모두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면 그 김치를 하나하나 소중히 담은 김치통을 집으로 옮겨 김치냉장고에 옮기는 일은 내 몫이다. 겁나게 열심히 날랐다. 이건 사실 아무런 일거리도 아니다. 그마만큼 김장김치를 담그는 일은 중노동에 가깝고, 우리나라 사람 대개의 경우 이 김장철만 되면 모두 걱정반 기대반의 마음이 대부분이다. 월동준비를 하는 마음이지만 힘든 일은 하고 싶지 않은게 요즘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최근들어 도시사람들의 새로운 풍경 중 하나가 소금에 절여진 배추를 택배로 시키는 모습이다. 얼마나 이게 힘든지 사실 해본 사람만 안다.
엄마는 집에 있는 아들 쳥겨준다고 보쌈 김치와 삶은 목살, 생굴을 챙기기 위해 엄마 말로는 외할머니와 개싸움을 벌였다는데 정작 그 보쌈고기는 맛이 별로였다. 이미 수차례 김장김치속을 버무려 왔고, 그 와중에 뜨끈한 돼지 목살에 바로 김치양념속과 굴, 배추말이를 함께 먹을 때의 맛과 향을 내 전두엽 우뇌가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많이 알면 인생이 고달프다. 사실 엄마도 그게 왜 맛이 별로인지 다음날 아침에 먹어보니 알겠다고 수긍한다. 그렇게 김장김치보쌈의 시식은 끝이 났다.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다음날이다. 아침 밥상에 오른 누룽밥, 사실 난 누룽지와 누룽밥을 좋아한다. 어렸을 적 방학때면 언제나 시골로 향했다. 그러면 아궁이 가마솥에 밥을 했더랬다. 할아버지께서 산에서 해온 나무와 장작을 손질해 아궁이에 불을 떼고 그 열기운이 가마솥의 밥을 하는 동시에 아랫목의 장판이 탈 정도의 난방에너지로도 사용되었으니 어찌보면 참 경제적이며. 실용적인 방식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가마솥에 밥을 하면 꼭 남는 것이 누룽지였다. 이 누룽지를 형태 그대로 뽑아내는 것도 사실 내공이 필요한 고도의 주방기술이다. 가끔씩 솥단지 그대로 퍼지는 누룽지를 보면서 저건 예술이구나 하는 생각을 당연히 어렸을 적엔 하지 못했다. 다 크고 나서 그 풍경이 예술로 느껴지니 언젠가 나도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누룽지를 퍼내고, 누룽지 파편 위에 누룽지 덩어리를 수제비 뜨듯 떼내어 거기에 물을 부어 끊으면 숭늉이 되었다. '우물가에서 숭늉찾는다'라는 말은 이렇게 많은 단계가 필요한데 맹물이 나오는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이 얼마나 성급한 언행을 의미했겠는가!
이 숭늉에 누룽지를 더 많이 넣으면 그대로 누룽밥이 된다. 난 이게 어려서부터 얼마나 맛있던지 시골의 추억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이 구수한 누룽밥과 숭늉이 마치 냄새까지 나는듯 눈과 코에 선하다. 사실 그 때 이후로 이 맛을 보기는 매우 힘들고 어려워졌다. 우리 주변에 가마솥이 거의 사라졌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골에 가면 이 누룽지와 누룽밥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난 다른 사촌형제들이 내 누룽지를 뺏어 먹을까 내 상의옷 배속에 넣고 자기도 했다. 언젠가 잠결에 누군가 내 배를 뒤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낄낄'대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내 누룽지를 찾아 낸 것이다. 그리고 사촌형 중 한명이 이렇게 말했더랬다. '야 앞으로 누룽지는 얘꺼야! 건들지마' 속으로 막 웃었더랬다. 그 기억이 마치 수채화처럼 너무나도 내 기억속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다. 누룽지와 누룽밥을 보면 언제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침에 오른 누룽밥! 사실 추억의 맛과 향을 비교하면 경을 칠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룽밥을 좋아한다.
누룽밥을 퍼 한 숟가락 떠 먹고, 음미를 하고 다시 뜨려 했는데 어느새 엄마가 김치를 쭉 찢어 내 누룽밥을 뜬 숟가락 위에 얹어주신다. 그 실루엣은 순간 왠지 포근하게 느껴졌다.
한 입에 김치가 올려진 누룽밥을 입안 가득히 물로 오물거린다. 누룽밥의 고소한 내음과 김치의 짜쪼롬한 맛이 혀를 자극하며 뇌로 전기신호가 전달된다.
사실 이 한 숟가락의 누룽밥은 전초전이었다. 한 숟가락 다시 푸는 엄마는 다시 맨손으로 김치를 쭉 찢어 아까맹꼬로 누룽밥에 올려 놓아주신다. 또 먹는다. 행복감이 전보다 더 커진다. 무엇 때문일까? 엄마의 존재감이 매우 크게 다가왔다.
어렸을 때도 그렇고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그렇고, 엄마는 언제나 내 누룽밥이나 밥에 물을 말아먹을 때에도 맨손에 김치국물과 고추가루를 묻히면서 올려 주신다. 그 한결같은 모습과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 아침밥상의 풍경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옆에서 이렇게 누룽밥에 김치를 올려주는 엄마의 손길에 마음 한구석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올라온다. 고마움과 함께 미안한 감정이 뒤섞인 매우 복잡한 감정이다.
이 묘한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기억에 남기고 싶어 사진을 찍는다. 그랬더니 엄마도 흥미로웠는지 당신께서도 누룽밥을 떠 김치를 올려놓으시고 투샷을 만드신다. 우리 엄마는 사실 센스쟁이다!
언제나 엄마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데 난 그런 엄마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었던가? 매우 당연히 받아먹는 것에 익숙한 이 상황이 매우 이기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한편으로 또 건강하게 내 옆에서 온 정성을 쏟아주시는 그 부모의 끝없는 사랑에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 그래서 사람은 자식을 낳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래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인가? 난 여전히 그 이후의 일은 잘 모른다. 그러나 오늘 이 낯선 아침밥상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꼈다. 너무나도 익숙했던 일상적인 밥상에서의 체험! 가족의 사랑은 밥상에서 커나간다는 말이 맞는 듯 하다.
엄마의 누룽밥과 김장김치 밥상에서 느낀 이 고마움이 실제로 엄마에게 보답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고 있다는 데에서 언제나 나의 문제점이 시작된다. 그리고 나도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효도 공수표를 날려보지만 엄마는 '너나 잘 살면 돼!' 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여전히 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냥 이대로 이렇게 계속 살면서 체험하고 부대끼며 또 고마움과 미안함에 사무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게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자식들아! 효도는 못하더라도 우리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수시로 하자. 사실 부모가 바라는 건 어찌보면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정도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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