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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만화를 많이 좋아했다. 형과 난 만화책을 많이 사드렸고, 우리집은 거의 만화방에 가까운 수준의 만화책이 쌓였다. 학교의 친구들은 우리집에 오는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만화책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떤 놈은 우리집 만화책을 빌려가 꿀꺽하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만화책에 대한 미련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 내 만화책을 꿀꺽한 인간들은 기억한다.


1989년 12월 눈이 펑펑 오는 밤이었다. 형이 만화책을 사러 동네 서점에 간다는 것이다. 그 당시 잡지 만화책이었던 '아이큐 점프'라는 만화책이었다. 이 때가 아마도 처음으로 만화책을 산 날이 아닌가 싶다! 형이랑 함께 밤하늘 아득하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만화책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선하다. 겨울은 참 이런 맛이 있는 계절이다.




형이 아이큐점프를 산 이유는 부록으로 붙은 별책이 있었는데 바로 '드래곤볼'이었다. 드래곤볼! 우리 세대에게 있어 상상력과 놀이, 대화의 꺼리를 무한히 제공한 일본만화 드래곤볼! 우리는 그걸 보고 자란 세대다. 형이 이 드래곤볼이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만환데 꼭 봐야 하는 것이라는 멘트를 했더랬다. 난 무슨 대단한 것인가 싶어 봤더니 그때 그 별책부록이 대략 2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의 초반이었다. 드래곤볼과의 첫만남이었다.


드래곤볼이라는 만화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템 하나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바로 '선두'다!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탑 위로 올라가 신선인 고양이에게 수련을 받으면서 먹던 콩으로, 신선콩을 의미한다. 이 말하는 고양이가 한달인지 석달인지 이 선두 하나만 먹으면 피로한 기운을 물리쳐주고, 배고픔도 없어진다고 하니 가히 충격적인 아이템이었다. 쉽게 말하면 박카스처럼 피로회복제이기도 하고, 비상식량이기도 한 이 콩이 드래곤볼 전체 스토리에서 꽤 중요한 기능을 한다. 큰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도 이 선두 한 알만 먹으면 생기가 돌며, 날라다니니 얼마나 신나겠는가! 병이나  굶주림과 같은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선두! 신의 세계에 존재할 만 상상의 약물이 아닌가!



지금도 이 선두같은 알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박카스로는 회복되지 않는 피로감과 상처나 병! 선두 한알이면 해결해 줄텐데 말이다.



2015년은 빌어먹을 한 해였다. 올 초만해도 이전에 반응하지 않던 많은 에너지들과 사건이 날 끄집어 당기길래 드디어 새로운 시작을 하겠거니 기대를 했건만 나의 순진한 바람은 여지없이 꺾어더니 순식간에 강렬한 우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게 6월이었으니 벌써 반년이란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 반 년이 참으로 지루하고, 껄끄럽고, 짜증스러웠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풀리는 것도 없이 우왕좌왕했다. 심리적 안정이 전혀 되지 않았다. 어렸을 적 겪지 않았던 사춘기가 지금 찾아온 듯 했다. 인생관과 가치관의 혼란! 이전 인생을 대충 살아온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최근 찾아온 바이러스에 노트북을 백업하며, 반강제적으로 데이터와 로그북, 사진들을 전체적으로 훑었다. 그러는 와중에 올 해 첫 달에 쓴 일정표를 보게 되었다.


 2015년 1월 2일!

내가 동기누나를 찾아가 사주를 본 날이다. 나에게는 삶의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고, 내가 선택한 길에 몇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있었다. 혹시나 몰라 함께 하기로 한 이(이하 의심하는 자라 칭함)의 사주를 들고 갔다. 평소 그다지 믿지 않던 사주였지만 가끔씩은 내 주변의 상황을 적절히 이해시켜주는 설명을 듣은 적이 있어 조심스런 마음으로 내 우려심을 조금이나마 위로 받고자 했던 것이다. 묻고자 했던 마음엔 의심하는 자의 위험성이 사주로도 나타나는지 알고 싶었던 가장 컸다.


종이 위에 내 사주와 의심하는 자의 사주를 써내려갔다. 필체가 좋은 누나는 손가락으로 육십갑자를 세며 사주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절대 이 사람과 함께 하지 마라! 이 사람과 같이 일을 하게 되면 워낙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너가 많이 상처를 받을꺼야!" 


순간 괜히 물어봤나 싶은 생각도 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기운 상태였고, 그래도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에 부탁했던 것이다. 나 또한 그 의심하는 자의 성향을 워낙에 잘 알았기에 나에게 좋은 기회였지만 얼마나 내가 버틸지를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확인을 위해 사주를 본 것인데 그 해석이 부정적이니 실망스럽긴 했다. 그렇지만 나의 결단은 누나의 사주조언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누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음, 그렇구나. 근데 누나, 나 이 길의 끝이 불구덩이라도 들어갈꺼야!"


누나는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면서 뭐하러 물었나고 타박읗 하며 만류했지만 나의 의지를 확인하고는 한 마디 덧붙인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가야지! 어차피 올 해 네가 나가는 삼재이니 액땜한다고 생각해!"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누나는 그 의심하는 자와 같이 가면 무진장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액땜은 하지 않느냐는 따위의 위로를 하다니.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차피 재수없는 삼재이니 그 의심하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이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말이기도 한 것 아닌가! 사주의 세계는 그런 것이다. 미래를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예언이나 점은 '맞으면 그만, 아님 말고!'로 끝나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책임은 사주를 물은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니까!


결론적으로 보자면, 나의 2015년은 누나의 사주분석대로 엉망이 되었다. 사주대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의심하는 자와 2개월간 함께 한 결과, 내게 돌아온 결론은 '실망'과 '상처', 그리고' 이별선언'이었다. 한 때나마 내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와 함께라면 내가 급성장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보란듯이 무너졌다. 더불어 이제까지 이렇게 단기간에 마무리 지어질 일을 4년간이나 기대감을 가졌다는 것은 나 스스로를 '병신'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된 것이다! 


2015년 1월 4일!

그 쪽 시장에서 일을 하는 후배를 만나 나의 앞으로의 생각과 의심하는 자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여러 이야기를 하며, 앞으로 많은 물음과 조언을 부탁했었다. 그 후배는 그 당시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조언을 해주었다.


"오빠!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려는 지는 알겠는데, 왠지 걱정되요! 이쪽 시장에선 오빠와 그 의심하는 자와 같은  관계는 존재하기 힘들거든요. 오빠가 나중에 상처를 받을까봐 좀 걱정이 되요!"


2015년 3월 16일!

스승님으로부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의 진로를 물으시길래 의심하는 자와 함께 하기로 했고, 그 이유로 차후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는 한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스승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병신같은 소리하지 말고, 가지마! 어차피 그 쪽 시장은 끝났어! 가면 시간낭비하고 너만 손해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지인들이 하나같이 똑같이 우려의 말을 전달하는데 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였다. 그 이유는 그 의심하는 자에게도 처음 일을 시잘할 때도 말을 했더랬다.


"나중에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당신과 함께 하는 겁니다!"


그리고 2개월 후 나는 불구덩이에 빠졌다!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나는 타버리겠구나하는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렬해졌다. 일요일 아침! 의심하는 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몇 가지 가정들에 확신이 드는 순간 어서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요일 하루동안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의심하는 자의 성향과 패턴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할 지 알았고, 나의 의지를 빠르게 관철하고, 맨몸으로 유유히 탈출하려는 시나리오를 담담한 마음으로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엑소더스의 날! 난 오늘 홍해를 가르리!'


난 그날 내가 만든 시나리오로 스테이지에 올랐고, 차분하게 그를 기다렸다. 정확히 1시간반만에 나의 쇼타임은 끝났다. 저항과 반박, 묘하게 들어오는 유도질문 등을 사정없이 잘라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의심하는 자에 대한 나의 몇 가지 가정들은 그대로 적중했고, 그것은 그의 단 몇 마디 질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봐봐, 너 어디서 공격들어왔냐? 협박받은 거 아니냐?"


결국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것 뿐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신변에 대한 안위였지 내 인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그의 말이 곧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재미난 사실은 그렇게 사람을 바라보는여러 테크닉들을 그로부터 익혔다는 아이러니다. 


대학 4학년! 수많은 전공수업을 들었지만 그 중에서 나의 지적 욕구를 터트린 수업이 있었다. 법철학 수업! 스승님께서 독일어로 된 법철학 교재를 직역해주시며, 나를 강렬히 흔들었던 수업중에 들은 내용이다. 사회계약론의 선두주자 토마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의 기초전제를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다!'


이 단순한 진리를 불구덩이에서 박박 기어나와 몸으로 체득하는 데 꼬박 6개월이 지났다. 어찌보면 이 단순한 진리를 인정하는 게 싫었다.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닐진대, 어찌 저리도 급격한 매도가 가능한가?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엎어진 땅위에서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이기를 위해 앞으로 향해야 했다. 이 대전제를 몸소 깨우치는 과정이 왜 6개월이 걸렸는지는 삼재의 영향인지 아니면 나의 멍청함이나 게으름인지, 모두 포함하는지는 정확히 분별하기 힘들다! 별 그지같은 일들이 압축적으로 착착 찾아왔었으니까 말이다.


2015년 12월 16일!

점심을 먹고 잠시 물끄러미 무엇을 바라보다 어떠한 고양된 감정이 느껴졌다. 행복감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드디어 삶의 균형감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카톡에 있던 의심하는 자의 계정을 삭제했다. 그에 대한 원망과 집착이 녹아드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었냐'라고 수백 번도 넘게 스스로에게 제기하던 의문도 봄눈 녹듯 사그라든다.


불가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원효대사에 관한 이야기다. 수행길을 떠나던 원효대사와 동문이 야밤에 잘 곳을 찾다 들어간 움막에서 잠을 청했다. 갑작스런 갈증에 주변에 손을 더듬어 믈이 담긴 그릇이 있어 원샷을 한다. 그리고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며, 편히 잠에 든다. 다음날 아침 자신이 무엇을 마셨는지 확인하는 순간 심한 구역질을 느끼며, 토를 한다. 알고보니 해골머리에 담긴 빗물이었던 것이다. 어제는 그리도 달콤한 물이 오늘은 나를 괴롭게 하는 물이 되었으니 그 사이에 변한 것은 단 하나! 어둠과 빛 사이에서 해골물의 정체를 알게된 인식하는 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마음 하나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것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대사의 해골물'이야기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말끔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니 사라져서도 안되는 것이다. 바로 흉터다! 

일본만화 '바람의 검심, 추억편'에서 주인공 켄신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려고 막부세력에 칼을 겨눈다. 어느날 문득 찾아온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과 어느새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함께 몸을 피신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여인은 과거 자신이 죽인 막부의 하급 무사의 아내였고, 남편의 죽음에 복수를 결심하고, 막부세력의 첩자가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을 그토록 많이 죽이던 켄신의 여린 마음을 깨달고 남편을 죽인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극적으로 여인이 자신의 품에 안겨 죽어가며 켄신의 뺨에 난 상처를 교차하는 다른 상처를 칼로 만든다. 그 이전의 상처는 죽은 전 남편이 낸 상처였다. 남편의 상처 위에 죽기 전에 다시 상처를 만든 그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나를 잊지 말라는 것이리라! 그렇게 켄신의 뺨에 십자상이 생긴 것이다. 만화 제목 그대로, 추억은 켄신의 십자상의 추억이었던 것이다.



십자상을 뺨에 새긴 채 켄신은 다짐한다. 

'이 유신이 성공한 이후, 나는 절대 사람을 죽이지 않으리라!'


켄신은 자신이 품은 대의를 위해 연인이 남겨준 상처를 평생 자신이 한 다짐의 증거물로 갖는다. 상처는 그렇게 추억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올 해의 마음의 상처 또한 아물어간다. 그토록 건들면 아프고, 쓰렸던 기억이 서서히 나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인간의 마음처럼 오묘한 것이 있을까? 알면서도 행동하고, 하지말아야지 하면서도 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 이 마음의 작용은 언제나 미지의 분야이다. 그러나 마음의 갈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는 순간 나는 평화를 얻었다. 



드디어 드래곤볼의 선두를 먹은 것처럼 내 마음의 병이 치유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남은 흉터는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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