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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지나면 기억이 흐릿해진다. 사람이 죽으면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잊게 하는 망각의 강을 건넌다는 데 이승에서도 강렬한 인상이 남는 기억이나 의미있는 추억이 아니면 대개 머리속에서 사라진다. 어쩌면 이 망각이 사람을 살리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평생 과거의 모든 기억을 다 머리속에 넣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에겐 미래가 없을 수도 있다. 언제나 과거에 사로잡혀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여정에 이승의 기억을 몽땅 리셋시킨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들린다. 새로움을 시작하기에 필요한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있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라든지, 연인과 사랑을 속삭였다는지 하는 기억은 언제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게 인간적이라고 할까. 이런 기능을 쉽게 해주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이 발명된지 20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가끔씩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낯설다. 현재의 삶에서는 기억재생의 가장 중요한 장치인 사진이 생활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엄마가 하는 말이다! 남는 건 사진 뿐이라고! 그 사진이 없으면 예전 추억의 현장을 머리속에 재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사진을 보면 순식간에 30년전으로 돌아가곤 한다. 사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는 순간이다.


30년전! 나에게도 유년시절이 있던 사실은 사진말고 증명할 길이 없다. 어떤 모습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오직 사진만이 답을 해준다. 부모님이나 친척들의 증언은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 요즘 아이들의 세대 중 몇 안되게 부러운 것들 중 하나는 디카의 생활화이다. 그들은 유년과 초등학생 시절의 모든 시기의 모습을 자신의 기억속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시절은 비싼 필름과 카메라값때문에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내 친구는 집에 불이나 과거의 모든 사진이 없어졌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에겐 오히려 소유하지 않아 자유로울 수 있으나 내게 가혹하게 느껴지는 슬픈 사건이다. 


몇달전 빛바랜 사진첩을 들춰 보았다. 개구장이들이 앨범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나의 유년시절이 그 틈바구니에서 생생히 느껴진다. 삶을 더 살고 노년이 되어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이 사진만큼 값진 보물이 있을까?


그 사진 중 몇 장이 눈에 띤다. 내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산타클로스와 대면한 사건이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 크리스마스라며 곧 산타가 썰매를 끌고 당도할 거라 했다. 교회에 붙은 유치원에 다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뚫어지게 지켜 보았더랬다. 그리고 빨간 의상을 갖추고 하이얀 수염이 난 산타클로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했던 기억이 난다. 모든 또래의 유치원 아이들이 숨죽이고 초집중하여 산타클로스를 바라본다. 그리고 곧 내 시선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어깨에 메어있는 보따리에 고정된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잔뜩 들어있는 그 선물 보따리 말이다. 빨간코 루돌프고, 썰매고 그런건 사실 부수적인 것이다. 어린 눈에는 빨간 보따리에 든 선물 뿐이었다.




사실 이때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산타를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와 심장이 쿵쾅되었다는 감정 상태만 기억하지 그 이상의 디테일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30년전에 찍은 현장 사진이 도와준다. 사진속에 나는 매우 어리고, 그 선물의 포장지는 그 당시 일반적이었던 매우 촌스런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땐 자연스럽던 산타도 엉성하기 이를 때 없다. 배불뚝이 너털웃음의 산타할아버지가 아니라 왠지 도둑놈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실루엣!


30년전의 첫 산타클로스와의 만남은 아이들의 상상과 낭만을 만들어주기 위한 어른들의 사기극 쇼였다! 그래도 뭐 어떤가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래도 그 당시 좋았던 기억만 가지면 족하지 않은가! 여전히 산타클로스는 요즘도 전국의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방문한다. 그들의 사기극은 결코 나쁘지 않다. 그래서 뻔한 고전쇼이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좋아한다. 그리고 이렇게 찍힌 사진을 30년이 지난 지금 보고 추억을 더듬고 있는 것은 또 얼마나 흥미롭게 재미난 이벤트 아닌가!


요즘의 크리스마스는 영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경제도 어렵고 하니 사람들의 씀씀이도 줄고, 각박한 현실에 치여 그런 것도 있지만 어린 시절 뻔한 사기극을 헐떡 대며 좋아하던 아이의 순진무구한 마음이 없어진 것도 한 몫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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